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2014)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듯한 성경 대서사극이었다. 종교적 관객은 경건을, 세속 관객은 스케일을 기대했다. 스콧은 둘 다 주었지만, 거기에 관객을 갈라놓는 한 이미지를 더했다 —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서 신을 만날 때, 신이 작고 화난 한 아이로 나타나는 것. 비평가들은 그 장면에서 자리를 떴고, 왜 라고 물었다. 답은 그 장면이 의지하고 있는 구절에 있다.
떨기 자체는 스콧이 늘 자연을 찍듯이 — 천천히, 아름답게, 논평 없이 — 찍힌다. 결정적 순간은 말로 온다. 모세가 묻는다. 백성에게 신이 나를 보냈다고 말한다면,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하리이까? 그러자 음성이 답한다.
거부하는 이름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히브리어 에헤예 아셰르 에헤예 는 번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어떤 이는 현재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어떤 이는 미래로 (나는 내가 될 자가 되리라), 어떤 이는 거부로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자가 되리라 — 나를 묶어두지 말라) 옮긴다. 모든 독해가 한 가지에 동의한다 — 그 구절은 더 쉬운 모든 이미지를 거두어 간다는 것. 몸도, 초상도, 비교도 없다. 이름은 이름하는 자의 자유를 이름 짓는다.
이 빛에서 스콧의 아이-신은 구절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그 난해함에 대한 경의에 가깝다. 그 아이는 작고, 형체가 신뢰되지 않으며, 모세의 안심에 무관심하다. 많은 관객이 견디지 못했다. 그 구절도 견디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모세가 따지는 이유
영화는 떨기에서의 대화를 임명이 아니라 논쟁으로 만든다. 모세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는 질문이 있다. 그는 사십 년간 이집트의 신들을 들어왔고, 이제 이 음성이 한 문장의 힘으로 한 백성을 바다 너머로 데려가라고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가 묻는다, 이 일을 하리이까?
구절은 그 질문에 인내가 없다. 구절이 주는 답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 — 은 모세의 정체성을 완전히 우회한다. 구원은 모세가 자격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그를 보내는 분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영화가 숨기는 선택
영화의 더 미묘하고 더 중요한 선택 — 스콧은 재앙들을 자연 현상으로 환원한다. 강이 붉어지는 것은 상류의 산사태 때문이고, 파리들은 시체 때문에 온다, 장자들은 한 번의 설명할 수 없는 휩쓸림 속에 죽는다. 영화는 구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가 자연을 통해, 자연과 함께, 자연 위에서 행하는지를 의도적으로 열어 둔다.
그 열림 또한 구절에 충실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는 방법을 명시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명시한다. 재앙은 증거고, 이름은 원인이다.
그 40초
출애굽기 3:14를 천천히 한 번 읽어 보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약 40초. 그 시간 동안, 왜 스콧이 한 사람 대신 한 아이를 골랐는지, 왜 모세가 영화의 나머지를 더듬으며 지나가는지, 왜 떨기가 타되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느낀다. 구절은 정체성 외의 모든 안심을 거둔다. 보내지는 것은 그것뿐이다.
떨기는 스펙터클이다. 이름은 의미다. 스콧은 둘을 다 찍었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것은 후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