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2014)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듯한 성경 대서사극이었다. 종교적 관객은 경건을, 세속 관객은 스케일을 기대했다. 스콧은 둘 다 주었지만, 거기에 관객을 갈라놓는 한 이미지를 더했다 —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서 신을 만날 때, 신이 작고 화난 한 아이로 나타나는 것. 비평가들은 그 장면에서 자리를 떴고, 왜라고 물었다. 답은 그 장면이 의지하고 있는 구절에 있다.
떨기 자체는 스콧이 늘 자연을 찍는 방식으로 찍힌다. 천천히, 아름답게, 아무 논평 없이. 결정적 순간은 말로 온다. 모세가 묻는다. 백성에게 신이 나를 보냈다고 말한다면,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하리이까? 그러자 음성이 답한다.
거부하는 이름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히브리어 에헤예 아셰르 에헤예는 번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어떤 이는 현재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어떤 이는 미래로 (나는 내가 될 자가 되리라), 어떤 이는 거부로 옮긴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자가 되리라. 나를 묶어 두지 말라. 다만 모든 독해가 한 가지에는 동의한다. 이 구절은 더 쉬운 이미지를 전부 거두어 간다. 몸도, 초상도, 비교도 없다. 이름은 이름하는 자의 자유를 이름 짓는다.
이 빛에서 스콧의 아이-신은 구절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그 난해함에 대한 경의에 가깝다. 그 아이는 작고, 형체가 신뢰되지 않으며, 모세의 안심에 무관심하다. 많은 관객이 견디지 못했다. 그 구절도 견디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모세가 따지는 이유
영화는 떨기에서의 대화를 임명이 아니라 논쟁으로 만든다. 모세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는 질문이 있다. 그는 평생 이집트의 신들을 들어왔고, 이제 이 음성이 한 문장의 힘으로 한 백성을 바다 너머로 데려가라고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가 묻는다, 이 일을 하리이까?
구절은 그 질문에 인내가 없다. 구절이 주는 답은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이고, 이 답은 모세가 누구인지를 아예 비껴간다. 구원은 모세가 자격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그를 보내는 분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영화가 숨기는 선택
영화의 더 미묘하고 더 중요한 선택 — 스콧은 재앙들을 자연 현상으로 환원한다. 강이 붉어지는 것은 악어들이 강 안에서 서로를 찢고 그 소용돌이가 나일강의 붉은 흙을 들어 올리기 때문이고, 파리들은 시체 때문에 온다, 장자들은 한 번의 설명할 수 없는 휩쓸림 속에 죽는다. 영화는 구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자연을 통해, 자연과 함께, 자연 위에서 행하는지를 의도적으로 열어 둔다.
그 열림 또한 구절에 충실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는 방법을 명시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명시한다. 재앙은 증거고, 이름은 원인이다.
직접 써 보기
출애굽기 3:14를 직접 옮겨 적어 보세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다 적고 나면 세 가지가 풀립니다. 스콧은 왜 어른 대신 아이를 세웠는가. 모세는 왜 영화의 나머지를 더듬으며 지나가는가. 떨기는 왜 타는데도 사라지지 않는가. 구절은 이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위안을 전부 거둬 갑니다. 그가 들고 가는 것은 그 이름뿐입니다.
떨기는 볼거리이다. 이름은 의미다. 스콧은 둘을 다 찍었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것은 후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