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다메섹 도상의 바울」은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체라시 예배당에 걸려 있다. 방문자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이것이다 — 말이 너무 크다. 캔버스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창백한 옆구리가 빛 속에서 빛나고, 들려 올려진 발굽이 화면 오른쪽 위를 채운다. 그 아래, 땅바닥에, 작은 남자가 등을 대고 누워 있다. 눈은 감겨 있고, 두 팔은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빛을 향해 뻗어 있다.
말이 너무 크다
그 남자는 사울이다. 곧 바울이 될 사람. 나이 든 마부가 고삐를 잡아 말을 붙들고 있다. 말은 무심하다. 발밑에 쓰러진 남자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영적 변화의 장면이다. 그런데 영적 행위자가 보이지 않는다.
카라바조가 그리지 않은 것
이 장면을 그린 이전의 화가들은 목소리를 그렸다. 구름 속의 그리스도, 영광의 광선, 천사 증인들, 때로는 하나님의 병거 발굽까지 그렸다. 카라바조는 이 중 어느 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리스도도, 천사도, 하늘의 표징도 없다. 있는 것은 땅에 쓰러진 한 남자, 그 위의 말, 그리고 어느 문을 통과하는 강한 오후 햇살보다 밝지 않은 빛뿐이다.
이 절제가 그림의 주장이다. 그 길 위에서 일어난 일은 바깥에서 그림으로 담을 수 없다. 카라바조가 상상한 위치에 관람자가 서 있었다면, 정확히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쓰러진 남자, 말, 당황한 마부. 초자연적 순간은 이미 땅에 있는 몸 안에서 일어난다.
뒤집힌 구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명사를 보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했다 — 다메섹에서 체포되고 있던 작고 위협받는 운동의 일원들을. 빛 속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쫓기고 있는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 한 문장이 권력의 방향을 뒤집는다. 박해받는 이가 박해받는 자신이다.
이것이 그림이 바울을 말 위가 아니라 말 아래에 두는 이유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들을 두었던 바로 그 땅바닥에 있다. 회심은 환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위치 변화로 시작된다.
그 40초
구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어 보라 — 질문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약 40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림이 알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떤 변화는 빛으로 오지 않는다. 자신이 사냥을 하던 말에서 떨어뜨려지는 방식으로 온다는 것.
말은 아직 서 있다. 땅 위의 남자는, 그 목소리가 누구 편이었는지를 이제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