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천장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아홉 개의 패널에 담고 있다. 제단에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패널 —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 — 은 빛과 어둠의 분리를 그린다. 미켈란젤로는 이 패널을 맨 마지막에 그렸다. 1511년, 그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평생 허리를 망가뜨릴 의뢰 작업을 거의 마쳐가는 중이었다. 붓은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도 그 서두름이 보인다.
첫 문장
하나님이 패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옷자락이 바람의 만돌라처럼 휘감기고, 두 팔은 위로 그리고 양쪽으로 뻗어 있다. 손바닥은 열려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지평선의 양 끝을 향해 뻗는 듯하다. 얼굴은 반쯤 돌려져 있어 비스듬히 봐야만 보인다. 만들어지고 있는 인물이 없다. 아담도, 진흙도, 손에 닿은 손도 없다. 다만 모든 것에 앞선 몸짓 하나.
이미지 이전에 오는 것
이 패널이 그리고 있는 본문은, 사실,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한 문장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히브리어 동사는 예히 — "있으라" 다. 세 글자. 그 언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명령 단위다. 불가타의 라틴어는 이를 더 줄였다. fiat. 한 음절. 문장이 너무 짧아서, 독자는 그것이 이후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거의 놓친다.
창세기 1장의 낯선 점이 바로 여기 있다. 창조는 도구가 아니라 발화로 시작한다.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에서는 신들이 망치나 칼, 그물을 든다. 히브리어 창조 신화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목소리가 멈추었을 때 세계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는 그 순간을 장면으로가 아니라 자세로 그린다 — 말하고 있는 중인 누군가, 음절이 아직 입에 남아 있는 모습.
먼저 들으라고 요청하는 이야기
창세기 1장의 독자는 이상한 위치에 놓인다. 처음 만나는 것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깨우고 있는 한 문장이다. 한 순간, 당신은 순수한 들음 속에 있다. 보기에 앞서 들어야 한다.
프레스코는 물감으로 같은 일을 한다. 아직 대상이 없다 — 빛도, 나뉠 수 있는 어둠도 없다. 있는 것은 입이 반쯤 보이는 인물의 몸짓, 그리고 아직 내용물이 없는 공간을 양쪽으로 벌리는 두 팔뿐이다. 시각 예술은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첫 대상이 있기 이전의 부재를 그린다. 명령문을 그린다.
다른 패널보다 덜 완성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름 때문이 아니라, 아직 완성될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는, 이 순간, 음절 한가운데 있는 입이다.
그 40초
구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어 보라 — 첫 구절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약 40초가 걸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프레스코가 알고 있는 것을 느낀다. 세계는 사물로 시작하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그리고 그것을 말할 의지를 가진 누군가로 시작한다.
빛 이전에 말이 있었다. 말 이전에, 아직 열려 있는 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