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 명화 속 구절

자신이 안고 있는 아들보다 젊어 보이는 어머니 — 그 모습을 먼저 본 예언자가 있었다.

어려 보이는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다. 대리석은 울지 않는다. 고난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장과 나란히 놓고 읽어봅니다.

Isaiah 53:4-5

피에타는 카라라 대리석 한 덩어리에서 깎아낸 작품이다. 서른세 살의 그리스도가 그보다 어려 보이는 여인의 무릎에 놓여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을 완성할 때 스물세 살이었다. 당대 평론가들이 나이의 부조리를 지적하자 그는 한참 뒤에야 이렇게 답했다 — 순결한 여인은 얼굴을 오래 간직하는 법이라고. 아무도 그 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불가능한 나이

다른 방식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마리아가 어려 보이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슬픔이 시간을 접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들의 몸을 안고 있는 이 순간, 그녀는 다시 강보에 싸인 아기를 처음 안았던 소녀다. 조각은 두 순간을 동시에 품고 있다. 아기와 시신. 시작과 끝. 둘 중 어느 쪽도 더 무겁지 않다.

대리석이 거부한 것

자세히 보면 마리아는 울고 있지 않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펴져 있다. 바치거나 내려놓는 손짓이다. 오른손은 아들의 어깨를 잡고 있지만 움켜쥐지 않는다. 겉옷의 주름은 거대하다.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마리아의 몸을 크게 만들었다. 무릎 위 성인 남자가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대리석은 무겁지만, 조각은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의도된 절제다. 오십 년 뒤의 바로크 조각가들이라면 입을 비틀고, 고개를 꺾고, 절규를 새겼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대신 침묵을 주었다. 슬픔은 관람자의 몫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 1972년 피습 사건 이후 방탄유리 뒤에 서 있지만 — 작품 주위를 걸으면, 그녀의 고요함이 오히려 견디기 힘들어진다. 감정은 돌이 아니라 당신의 것이 된다.

그 모습을 먼저 본 예언자

수 세기 전,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는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을 지는 한 인물에 대해 썼다.

이사야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놀라운 것은 대명사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이 종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독자에게 속한 것을 대신 지고 가는 이다. 훗날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을 십자가 위에 겹쳐 읽을 때, 그들은 문법을 바꾸지 않았다 — 그대로 받아들였다. 종은 짊어진다. 그리고 그 무게는 우리의 것이다.

피에타가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리아는 아들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짊어진 모든 것을 안고 있다. 그녀의 고요함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다. 무게가 자리 잡는 순간이다. 그런 무게 아래서는 소리칠 수 없다. 다만 안고 있을 뿐이다.

그 40초

이사야 53장의 5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어 보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약 40초가 걸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조각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당신도 조금 느끼게 된다. 어떤 슬픔은 이름 붙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워서 침묵으로만 짊어진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오래 그 무게를 지고 있어 왔다는 것.

대리석은 울지 않는다. 예언자가 이미 말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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